KRpia - 한국의 단청예술

그로부터 수년간 시왕초 · 천왕초 · 여래초의 선묘습화(線描習畵)를 각각 3천장씩 무려 9천여 장을 그린 끝에 비로소 스승으로부터 금어(金魚)의 칭호를 하사 받았는데 그 때 나이 18세였다. 조선후기 전통화사의 계맥을 이어받은 스승 김예운화상은 한말 이후 금강산 화맥을 이끌어온 불화계의 거장으로서 당시 서울 안정사(安靜寺)에 상주하고 있었다.

20세에 스승의 하교로 처음 편수(단청책임자)를 맡아 시공한 단청불사 건축물은 평양의 황건문(皇建門)을 옮겨 복원한 서울 조계사의 일주문이었다. 첫 작업을 무사히 마친 스님은 예운선사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0여 년간의 사사(師事)를 마치고 단청책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산 표훈사 16나한전 금단청(1928)을 비롯하여 강원도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등 유수 사찰의 주요 전각에 금단청을 시공하였다.
광복이후에도 서울과 경기도를 포함한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사찰 · 사당 · 궁궐 · 문화재 건축물 등의 금단청장엄의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단청에 탁월한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원인은 불화작업으로 기초를 탄탄히 닦은 결과에 있다고 스님은 말한다. 단청은 처음부터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찰에서 불화수업에 충실하다보면 저절로 단청기법이 습득되었다는 것이다. 즉 단청만을 위한 공부는 따로 없었으며 평소 불화제작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히 익힐 수 있는 것이 곧 단청의 기법이었다. 따라서 스님은 처음에 불화작업에 보다 집중적인 열정으로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한편 광복이후 차츰 전통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정부에서는 196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도의 입법을 시행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만봉스님을 비롯하여, 김일섭, 원덕문 등 3인의 승려 화사를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보유자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만봉스님의 불화적 기예는 예배용 · 교화용 · 장엄용을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하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예배용 불화는 글자 그대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제작한 그림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교리상 예불은 중요한 의식이다. 따라서 조선시대부터 왕성하게 제작된 후불탱화는 거의 대부분이 예배용 그림이다. 예배용 불화는 법당 불단의 후불탱화, 괘불화, 신중탱화, 조사영정탱화 등을 말한다. 또한 경전의 내용을 압축 묘사하여 불심의 효과를 나타낸 그림을 교화용 불화라 한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묘사한 팔상도, 부처님의 전생설화를 그린 본생도, 지옥을 묘사한 지옥변상, 감로탱화, 극락왕생도, 각종의 경변상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스님은 상주처인 봉원사 법당의 모든 예배용 · 장엄용 불화를 위시하여 전국 각지의 사찰에 수많은 탱화를 조성하였다. 한 폭의 불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정성, 고도의 숙련된 기예가 수반되어야한다. 즉 승려가 갖추어야할 무상정진의 수행의 의지를 담아 금어(金魚)가 갖추어야할 최상의 경지로서 그 많은 부처님을 세상에 구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스님이 불화작업가운데 창작의 열정을 쏟아 부은 분야는 장엄용 그림이다. 장엄용 불화란 불전과 불상 등을 장엄하여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아름답게 승화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장엄용 그림은 주로 건축물 각 부재의 단청과 불벽화 등에 그려진다. 그러나 장엄용 그림은 고정된 도상을 그대로 묘사는 것에서 탈피하여 끊임없는 변화와 창작의지를 반영할 수 있다. 선대로부터 계승된 초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용 · 교화용 불화에 비하여 장엄용은 작가의 창작의지와 예술적 소양이 요구된다. 원래 단청문양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스님은 각 문양의 상서로운 뜻을 이용하여 이 시대의 새로운 장엄용 불화를 창작하는데 몰두하였다. 단지 장식에 지나지 않았던 단청문양이 격물치지의 상서로움을 담은 스님의 붓끝에서 동시대적 새로운 장르의 불화로 현현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문양을 각색한 보상화문도(寶相花文圖), 오채쌍봉도(五彩雙鳳圖), 오채운룡도(五彩雲龍圖), 궁모란도(宮牡丹圖), 비룡관음도(飛龍觀音圖), 오채영락도(五彩瓔珞圖), 달마도 등은 평이한 전통적 소재에 현대적 미적 정서를 부여한 창작불화로서 승화되었다. 특히 부귀를 상징하는 의미의 두 폭 가리개 궁모란도는 우리의 전통예술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모체가 되어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에 1998년 10월 20일에는 평생을 받쳐 전통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국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올해(2001년)로 만 92세가 되는 스님은 거동이 불편한 노구에도 불구하고, 평소 하루에 10시간 정도는 거뜬히 붓을 잡는다. 불과 수 년 동안 5회에 걸쳐 불화개인전을 개최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노선사의 불퇴전(不退轉)의 자세는 이 시대의 모든 후학들에게 벅찬 감동과 귀감으로 승화되고 있다.
만봉스님은 평소 후진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이미 많은 문하생들이 스님의 가르침 속에서 새로운 금어로 거듭났다. 그러나 광복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문하에서 시왕초 · 천왕초 · 여래초의 선묘습화를 각각 천 여장 이상씩 그린 끝에 특출한 경지를 인정받아 금어의 칭호를 하사 받은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스님의 자상하고도 엄숙한 가르침 속에서 거듭난 이세환, 이인섭, 홍창원, 박정자, 양선희, 김정순, 배정숙, 김창순, 이형기, 박귀영 등은 이 시대 이후에 스승의 위대한 화업을 계승할 제자들이다. 현재 이인섭은 스승의 문하에서 전수조교로서 활동 중이며, 일찍이 준보유자로 인정된 박정자는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전남 나주에서 불화조성에 일념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홍창원, 양선희 2인이 문화재청 새로운 전수조교로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김정순, 배정숙, 김창순 등은 전수를 마치고 이수자의 위치에 있으며, 전수장학생 이형기와 박귀영은 그 출중한 기예의 배가를 위하여 분골쇄신중이다.
위 제자들 가운데 스승의 단청경지를 법통수계한 이가 홍창원이다. 문화재수리보수단청기술자이기도 한 홍창원은 일찍이 지우학이 되던 15세에 만봉스님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어려서부터 사찰의 단청과 불화에 심취하였던 그는 한창 뛰어 놀 소년시절에 이미 단청장의 계고(稽古)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 후 타고난 소질을 바탕으로 일취월장하여 금어로서 경지를 인정받았는데, 특히 젊은 시절 스승의 주특기였던 단청부분의 화업을 계승하는데 주력하였다. 현재 홍창원은 스승의 세심한 지도와 자문으로 창덕궁 인정전 복원단청,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문화재 건축의 단청복원에 혁혁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다.